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03. 태종실록 (휴머니스트 2005.04) – 왕권을 세우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를 따라다니며 조선 건국에 큰 힘을 보탰지만, 정도전을 죽이고 두 번의 왕자의 난을 통하는 등 어렵게 왕이 된 태종 이방원. 그는 과연 왕으로써도 잘 했을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우선 그가 태조와 왜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을까?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태종이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인데, 정몽주를 죽이고 정도전을 죽이는 등의 그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까?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라도 태종이 없었더라면 왕이 되지 못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두번째 부인의 말에 넘어가 서자를 세자로 책봉한 것은 누가 봐도 잘 못 된 것인데, 그 판단에 좀 더 신중을 기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태종의 정치의 목표는 정도전과 비슷하게 개혁을 원했을지라도 방법은 달랐다. 정도전이 신권 정치를 원했더라면 태종은 왕권 강화를 꾀했기 때문이다. 왕이 강한 권력을 가지는 것과 그 반대인 신하가 강한 권력을 가지는 것 중 무엇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중용을 지키는 것이 중요할까? 그런 원칙적인 이야기보다는 백성에게 좋은 정책이 나올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그리고 조선의 정치 체제를 살펴 보면 왕 밑에 의정부(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가 있고, 그 밑에 6조 체제(행정)가 있고, 따로 사헌부과 사간원(대간, 언론), 그리고 의금부(사법)이 있다. 왕과 신하에서 신하를 또 나누면 의정부와 6조인 대신과 사헌부와 사간원인 대간이 있었는데, 왕과 대신, 대간은 서로 견제했던 것이다.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의정부의 기능을 약화시킨 6조직계제로 변화시켰다는데 6조직계제가 왜 왕권이 강한지는 잘은 모르겠다. 그리고 전국을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8도체제로 재편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단 이때는 함경도가 아니라 함길도였다.)

태종이 왕이 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사람 중에 그의 부인 원경왕후 민씨도 있다. 하지만 태종이 왕이 되고 난 후에 후궁을 여럿 만나는 등 민씨에게 잘 하지만은 않는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처가를 몰락시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인 태조가 부인에게 휘둘려 세자를 잘 못 책봉한 것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처가의 권력이 너무 쌔서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어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자신이 왕이 되는데 동지이자 참모이면서 후견이었던 민씨의 가족을 그렇게 몰락시켜야만 했을까?

그리고 태종과 함께 조선 초의 기틀을 만든 하륜에 대해서도 태종의 대우가 아쉽다. 부족하다는 것 절대 아니다. 오히려 과하다는 것이다. 하륜은 일처리가 빠르고 거침없어서 비방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오백 년 조선의 근간이 될 각종 정책들이 그를 통해서 입안 실행되었다. 그런 부분이야 칭찬 받아 당연하다. 하지만 재산 증식에 있어서도 거침없었기 때문이다. 친인척, 측근들과 함께 무단으로 백성들을 동원하여 간척을 하고는 그 땅을 사유화했고, 노비들까지 벼슬을 팔아먹는다는 비판도 있었으며, 현량을 추천하라는 명을 받고는 함량 미달의 측근만 추천하였다고 한다. 꼭 필요하다면 큰 허물도 덮어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왜 그렇게 부정부패가 심한지 모르겠다. 이제 막 읽기 시작했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거의 느낄 수 없다. 어쩌면 한국인에게는 부정부패 유전자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태종에게는 양녕과 효녕과 충녕, 그리고 막내 성녕, 이렇게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우선 이 이 태종 실록이 세종 때에 쓰였다는 것을 알고, 양녕과 충녕에 대한 평가를 봐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내가 알아오던 사실과는 매우 달랐다는 것이다.
태종은 자신이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자기 다음은 적장자로 하여금 왕을 잇게 하고 싶었던 생각은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양녕이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켜도 태종을 계속해서 용서를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효녕은 크게 튀지 않는 성격인 스마일맨이었다고 하는데 이도 맞는 것 같고 효녕은 왕의 자리에 별 욕심이 없어 보였다.
다만 양녕에 대한 평가과 충녕에 대한 평가는 잘 모르겠다. 양녕은 세자로 책봉된 후에 세자 교육을 받고, 충녕은 그러지 아니하였다. 그러한 교육이 양녕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양녕은 학문보다는 활쏘기와 사냥을 좋아했고, 주색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충녕을 달랐다. 어려서부터 영특한데다가 공부를 좋아했다. 세자교육 같은 틀에 얽매이지 않고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보고, 갖가지 악기를 익혔으며, 그림, 화초, 수석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통제되었던 세자교육 때문이었을까? 양녕의 성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외가를 몰락시킨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었을까? 그리고 충녕은 도발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고는 했는데 세자를 향한 충정이었을까? 아니면 도전이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양녕은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기에 태종은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다. 그리고 세자 책봉 후 2개월 뒤 자신은 물러난다. 충녕의 왕권을 위해서라고 하였다. (이것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빨리 왕이 되는 것이 어떻게 왕권이 더 안정될까?) 그렇게 태종은 18년 동안의 재위를 마친다.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0. 16.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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