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때문에 나라를 망쳤던 선조.
조선 최초의 방계인 선조. 명종에게 있었던 세자가 어릴 적 죽는 바람에 또 다시 준비되지 못 한 인물이 왕이 되었다. 조선 왕조 실록을 읽다 연산군일기만큼 화가 나는 부분이 선조실록이다. 작가에 따르면 선조실록은 분량은 많지만 기록이 너무도 부실하다고 한다. 사건들은 모호하고 인물들도 뚜렷이 다가오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서도 눈에 띠는 인물은 이이와 이순신이었다고 한다. 내가 읽어본 박시백의 조선왕조역시 그랬다. 이이 위인전과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난중일기는 못 봤지만.)

16세에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인순왕후가 섭정을 함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7개월 만에 섭정을 거두고, 열일곱 살인 선조에게 모든 것을 넘겨준다. 선조 즉위 초기에는 기대승과 이황이 있었지만, 노소간의 갈등으로 이황과 기대승은 물러나고, 이이가 등장한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남다른 능력을 보였던 이이는 스승이기도 한 어머니 사임당 신씨를 잃고 깊은 실의에 바진다. 이 때 죽은 뒤에까지도 비난받게 되는 결정을 내리는데 금강산의 절로 들어간 것이다. 이 때 나이 열아홉이었다고 한다. 입산한 그는 1년 동안 불경을 파고 들었고, 어느 날 다시 유고 경서를 펴든 그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고, 그 길로 하산했다고 한다. 29세가 되는 명종 19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관직에 들어선 뒤 선조 1년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면서 경연에 임하게 되는데, 경연장은 곧 그의 독무대로 바뀐다고 한다. 그리고 천재 소리를 들으며 최고의 엘리트로 살아온 이답지 않게 나라와 백성이 처한 구체적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문제 해결에 대해 절박한 사명감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로 나라에 꼭 필요한 정치인이다. 그리고 경연 때마다 경장(정치적, 사회적으로 묵은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그는 독학했기에 서경덕이나 이황, 조식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학설이나 처신에 비판할 부분은 비판을 했다고 한다. 반면 그들의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강했기에 독학파인 율곡과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왕의 기분을 고려해 듣기 좋게 말할 줄도 몰랐다고 하는데, 이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러다 왕이 이이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지체 없이 사직했다가, 다시 부르면 사양하다가 나오면 또 경장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물러나서 학문에 매진할 때도 중앙정치의 흐름에 관심을 기울여 바른 정치와 경장의 필요성을 논했으며, 동 서의 화합에 힘을 보태려 했다고 한다. 그러다 선조 15년부터 이이는 왕의 신임을 받기 시작해 권력을 얻기 시작하고, 그는 때가 왔다고 여기고 의욕적으로 일한다. 그리고 경장 주장도 구체화했다고 한다. 왕도 전에 없이 전폭적으로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이 역시 조광조와 같이 실수를 범하고 만다. 북방 관련해 일처리를 조치를 먼저 시행하고 보고하는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대간을 비롯한 삼사의 공격을 받게 되어 물러나고 만다. 하지만 선조는 계속 이이를 등용하고자 하는 듯을 비추는데, 선조의 일생을 통해 한 신하에게 이 정도의 애정과 신뢰를 보인 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고 한다. 작가의 판단으로는 ‘처음에는 동인을 제어하기 위해 이이를 발탁했지만 지내보니 정말로 군자더라고’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한다. 선조가 이순신도 한 번 제대로 믿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나라의 근본을 수술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처럼 왕의 신임 아래 의욕적으로 일했지만, 그 기간은 고작 1년 남짓밖에 되지 못했다. 탄핵으로 사진하고 물러난 지 석 달 뒤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선조 17년) 너무 아까운 인물이다. 딱 5년만 더 살아줬더라면 조선은 정말 많이 변할 수 있었을텐데.
고독했던 율곡의 가치를 알아주었던 이들로는 백인걸, 박순, 성혼, 정철 등이 있다고 한다. 백인걸과 박순은 이이의 한참 선배 뻘로 이이를 매우 좋아했다고 하고, 성혼과 정철은 벗으로 학문적 견해 차이가 있지만, 사이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고 한다. 정말 멋진 사람들이다. 고독했던 이이 옆에 그들이라도 있었기에 이이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백인걸, 박순, 성혼, 정철도 아주 훌륭한 분들이다.

그리고 선조하면 생각나는 것은 임진왜란이 있다.(선조 잘못은 아니지만.) 그 당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일본을 통일하고, 대륙(명나라)을 넘보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에 도움을 청하고자 사신을 보낸다. 조선 역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통신사를 보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의중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선조24년, 통신사가 돌아와 아뢰길, 정사는 황윤길은 공격해올 것으로 보았고, 부사인 김성일은 그런 낌새를 발견하지 못 했다고 한다. 동행했던 서장관 허성(더구난 그는 동인이었다.)도 왜침이 있을 것이라 했지만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판단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으로 전 국민이 힘들어 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한다. 그러다 선조 25년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결정 짓고 총동원령을 내린다. 이 정보는 사신을 통해 조선해 전해졌다. 그랬음에도 경계조차 게을리 한 조정이었고, 일선 장수들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조선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8,700명의 침략군 선봉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고 나서야 침략 사실을 알았고, 상륙을 저지시키기 위한 해전 한 번 없었다고 한다. 처음 대적한 부산진성과 동래 산성에서 정발과 송상현과 군민들이 잘 싸워졌으나 성은 함락되었다. 이 두 싸움을 통해 일본군이 입은 피해는 전사 100여명, 부산 400여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군의 매운 맛은 거기까지였다고 한다. 경상 좌병사 이각은 동래성에 들어왔다가 전투가 시작되자 도망가버리고, 경상 좌수사 박홍은 성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경상 우수사 원균은 무기와 배를 바다 소에 밀어넣고 도망갔다고 한다. 5만 명의 군대로 20여일만에 서울까지 쓸어버린 일본군, 그리고 의주까지 도망가기에 바빴던 선조,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이 깨지고 만다. 바로 조선에는 전라 좌수사 영웅 이순신이 있었던 것이다.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함경도부터 시작해서 많은 공을 세웠지만, 관직은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제자리걸음을 해야 했던 이유는 승진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력은 커녕 찾아오는 기회도 차버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일찍이 이이가 이조 판서로 있을 때 만나보고 싶어했는데, “대감께서 인사권을 갖고 계신 동안은 찾아뵐 수 없다고 여쭈어라.”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다 1591년(선조 24년) 전라 좌수사에 제수된다. 그 때부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순신은 전쟁 대비에 총력을 기울이는데, 전함을 건조하고, 화포와 화약을 준비했으며, 군사 훈련을 거듭했다고 한다. 조정의 판단과는 달리 이순신은 일본의 침략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육로를 장악한 일본군이었지만, 이순신만 만나면 백전백패였다. 모든 것을 준비한 이순신의 승리였다. 이순신의 승리가 계기가 되어 경상도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은 슬슬 기세를 잃고 만다.

하지만 선조는 끝까지 이순신을 폄하하고 원균을 높이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작가는 선조의 행동이 이순신에 대한 질투라고 판단하고 있다. 선조가 이이 처럼 이순신을 몇 번 만나봤더라면 이순신을 신임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주위 신하들도 처음에는 이순신 편을 들었다가고, 끝내 선조의 발언에 동의하고 만다. 다만 이원익을 비롯한 몇몇 만이 끝까지 이순신을 변호했다고 한다. 정말 모두 다 싸잡아 갈아마시고 싶다. 유성룡 역시 나중에 원균 편을 드는데, 너무도 안타깝다. 그리고 그 잘난 사람들 덕분에이순신이 해군에서 물러나자, 칠천량 패전으로 이순신이 애써 키운 수군이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그 외에 의병이나 관군을 이끌었던 권율, 김시민, 곽재우, 김면, 고종후 등 훌륭한 사람들이 매우 많다.

박시백의 조선 왕조 실록을 11권 광해군일기로 시작해서 10권 선조실록까지 읽었다. (현재 12권 인조 실록까지 나와있음.) 평소에 알고 있던 역사와 약간씩 다른 것이 있다. 예전에 글로 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지루했는데, 이것은 만화라서 그나마 괜찮다. 인물을 그리는데 있어서 작가의 시각이 많이 들어가 있지 않나 조심스레 비판해 본다. 사극을 좋아하는 사람, 국사 공부를 필요로 하는 사람, 역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강력 추천을 해주고 싶다. 그리고 꼭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된다. 우리 역사이기에 알고,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1. 13. 17:13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너무나도 짧았던 재위기간이었던 인종.

중종 실록에 인종에 관해서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중종 시절이 연산군 이후 정신 없는 시절이었고, 사화가 많아서 그랬던 것인가? 아무튼 인종은 천성이 어질고 유학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으로 온 조정의 기대를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계모 문정왕후를 지극한 효성으로 대했고, 나이로는 아들뻘의 연배인 이복동생 경원대군(문정왕후의 아들)을 우애로 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종 즉위 후 좌우에는 명망 있는 대신들이 포진했고, 사림의 맥을 잇는 신진들이 언관의 중심 세력을 형성했다고 한다. 인종 재위 때 신하들이 가장 역점을 둔 일은 ‘임금에게 제대로 된 밥 먹이기’였다고 한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부왕을 간호하는가 하면, 중종이 죽자 유교식 예법에 따라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했다고 한다. 너무나 착하고도 어진 임금이 아닌가? 약을 극구 거부하는 태도에서 보여지듯, 삶에 대한 의지나 미련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고 작가는 판단하고 있다. 향년 31세, 자식이 없었고, 재위기간 9개월도 안 되 눈을 감고만 인종, 착하고 어진 성격으로 적어도 5~10년간만 재위에 올랐으면 하는 생각이 너무나도 많이 드는 왕이었다.


문정왕후의 꼭두각시였던 명종.

당시 조정은 인종 측근이었던 윤임을 비롯한 대윤과, 명종(경원대군) 측이었던 문정왕후를 비롯한 소윤으로 나눠져 있었다. 중종이 생각보다 빨리 죽고 인종이 왕위로 오르자 소윤측은 긴장했지만, 인종은 보복정치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종 역시 왕위에 오르자마자 눈을 감아 명종이 왕이 되고 소윤측이 실세를 잡는가 했다. 조선에 다시 수렴청정의 기간이 오는데, 문정왕후를 이르러 조선을 통틀어 가장 권력이 셌던 여성이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명종 시절부터 조선의 짜증나는 역사는 시작하는 것 같다. 뭐, 그 이전부터 조선의 짜증나는 역사는 많았으니, 굳이 명종이 시작은 아닌 것 같다. 수렴청정을 한다고 해놓고는 여왕으로 정치를 하는 문정왕후, 정치를 하는 것은 좋지만 왜 보복정치(대윤에 대한)를 하냔 말이다. 과거에 윤임에게 당했던 것에 대한 복수라고 치더라도, 명종을 조금 더 키워주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래도 하나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은 대윤을 물리치고 나서는 이렇다 할 옥사는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녀의 국정 장악능력이 뛰어났고, 사치, 향락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궁중 연회도 좀처럼 열지 않았다고 한다. 역시 아쉬운 것은 사림을 혐오하고 측근들의 정보와 판단에 의존한 정치를 한 부분이 있는데, 측근들이 부패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명종 8년, 명종의 나이 스물이 되었는데도 수렴청정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그 해 7월 명종에게 친정을 넘겨주었다.
그렇게 명종 8년 문정왕후가 물러났지만, 명종은 자신만의 정치를 할 수 없었다. 문정왕후가 정치에 관여한 것은 아니었으나, 명종이 문정왕후의 눈치를 봐야했고, 조정에는 문정왕후의 측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는 그녀의 측근들이 하나 둘씩 제거되기 시작한다. 그 후 명종은 무엇인가 다른 모습을 보인 듯 하다. 하지만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2년 뒤 명종 역시 죽고 만다. 명종 자신만의 정치를 보여주기에는 짧은 시간이지 않았나 싶다. 연산군으로 황폐해진 조정을 빨리 바로잡아놨어야 하는데, 문정왕후와 명종, 문정왕후가 정희왕후처럼 명종을 위한 정치를 했었더라면, 명종 역시 성종처럼 성장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명종 때의 인물로는 10여 년 전에 드라마로 나왔던 임꺽정이 있다. 임꺽정이 도적이 된 이유에 대해 사관의 논평을 작가가 실어놓았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지금의 재상들은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끝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세가를 섬기느라 못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고는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랴?
진실로 조정이 청명하여 재물만을 탐하지 말고 어진이를 수령으로 가려 뽑는다면 칼을 든 도적들이 송아지를 사서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르려 추적하여 붙잡으려고만 한다면 붙잡는 대로 또 뒤따라 일어나 장차엔 다 붙잡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 후로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역시, 명종 때의 사람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영민했고, 공부를 좋아한 이황은 과거에는 큰 뜻이 없었지만 어머니의 바람을 좇아 준비하여 서른네 살에 급제했다. 풍부한 학식, 온유한 성품, 원만한 대인관계 덕으로 빠르고 순탄한 승진을 하나, 마흔다섯 살에 을사사화를 만나 학자로서 학문에 몰두한다. 기대승과 8년 동안 편지로 주고 받으면서 논한 사칠 논쟁도 학문에 몰두하면서 한 일이다.
그런 이황과 더불어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인 남명 조식은 이황과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이황이 학문 자체를 좋아하여 깊이 파고드는 유형이라면, 조식은 핵심을 체득하고 실천을 중시하는 유형. 이황은 현실정치에 몸담으면서도 시사 문제는 애써 피하려고 했고, 조식은 현실정치를 거부하면서도 세상사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분개하고 비판했다. 퇴계가 고요히 흐르는 물이라면 남명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 그렇게 다른 두 사람이었다고 작가는 판단하고 있다.
당시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대학자들답게 둘은 끝까지 서로에 대해 나름의 예를 지키며 표나게 대립하지 않았다. 하지만 뒷날 제자들은 상대의 스승을 비판하며 격렬히 대립하게 된다. 유성룔, 김성일, 조목, 기대승 등 그의 제자들은 퇴계학파를 형성하여 나중에 동인-남인의 중추를 이루게 된다. 남명학파를 형성한 조식의 제자들로는 정인홍, 김우옹, 곽재우, 최영경 들이 있다. 실천을 중시하는 조식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그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적극 활약했다. 동인-북인의 중추를 이룬 그들은 광해군과 함계 집권에 성공했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면서 괴멸되다시피 했다.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1. 12. 11:26




준비되지 못 했던, 고독한 왕 중종.
작가 후기에 나오는 중종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다른 두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는 것이다. 실록에 실린 사관들의 평가도 그러하다. “왕은 인자하고 현명했다. –중략- 다만 인자하고 온화함에는 넉넉했으나 과단성이 부족했고, 진퇴, 용사에 현명함과 불초함이 뒤섞이는 실수가 많았다. 이로 인해 군자와 소인이 번갈아 진퇴했고, 권간이 왕명을 도둑질했으며, 변고가 자주 일어났다. 정치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실록 역시 글쓴이의 주관이 들어가 있기에 100%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우유부단 했던 왕인 것 같다. 하지만 조광조나 김안로를 내칠 때의 왕은 굉장히 결단력이 빨랐는데, 그래서 이중성을 띤 왕이라고 하는 걸까?

중종시대의 대표인물은 박원종을 비롯한 정국공신들, 그리고 개혁을 단행하던 조광조, 현실과 타협하면서도 할 일은 했던 남곤, 그리고 갈아마셔도 모자란 김안로,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본 받아야 할 정광필 등이 있다.

중종은 왕이 될 자리에 서열에 있지 않아, 왕이 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대군이었다. 연산군 덕분(?)에 갑자기 왕이 된 중종은 처음부터 미덥지 못한 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연산군이 왕일 때에는 모두가 숨소리조차 죽여 지내던 시대였었기에, 그 역시 조용히 지냈을 것이고, 세자도 따로 있었기 때문에 따라서 자연스레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연산군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 났기 때문에 왕권보다는 신권들이 더 강했을 것이다. 그런 중종을 이용해 공신책봉부터 어이 없는 결정들이 나고 만다. 연산군의 총신들도 공신에 책봉되어지는, 대한민국이 독립하고 나서의 친일세력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상황이란 비슷한 상황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연산군 때 세력이 약화되었던 대간들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종 초기에는 유자광을 때려잡는 무오사화와 몇 번의 옥사를 통해 중종은 왕의 자리를, 공신들은 대신 자리를 잡아간다.
중종 초, 변방과 남도의 군사력은 약해져 있었는데, 그 때 3포 왜란이 일어났고,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만들 임시기구가 비변사였다. 경국대전에도 없는 이 임시기구는 사라지지 않고, 이후 점차 그 권한이 강해져 조선 후기에는 최고의 의결기구로 자리 잡으면서 왕권을 제약하기에 이른다. 군사력을 강화시켜야지, 비변사를 계속 놔두면 어떻하냐는 생각이 든다.
중종 8년, 정막개라는 사람의 고변으로 신윤무와 박영문가 죽음으로 반정을 이끌었던 핵심 공신들은 거의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고, 중종 10년 조광조가 나타나면서부터 개혁이 시작된다. 내가 알고 있던 조광조와는 상당히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느낌은 강경하고, 재물욕은 아니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과격한 사람이 아니라 굉장히 온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김굉필의 제자였던 조광조는 김굉필의 역향을 많이 받았다. 김굉필은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제자로 알려져 있지만, 스승이 사장(시와 문장)을 중시한다고 여기고 인연을 끊은 인물이다. 이후 홀로 경학 연구에 몰두했으며, 소학을 중시했다고 한다.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 떄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떄 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조광조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경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옛 성현의 가르침대로 행하려고 한다. 바른 자세, 경학 위주의 공부, 사색을 통한 원리 탐구, ‘소학’중시, 근본을 앞세우는 원칙적 자세 등 조광조가 몰고온 자람은 젊은 유생들을 매료시켰다고 한다. 중종 또한 늘 조광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소격서 폐지를 원하는 조광조와 그것을 원하지 않던 중종 사이에 조광조가 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만다. 그리고 정국공신을 바꾸라고 주장을 하자, 정국공신의 반감도 사게 되고 중종의 신임도 잃게 된다. 모두가 조광조의 공으로 돌리고, 조광조는 중종에게는 자신의 주장만 하였다. 조광조가 자신의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중종의 말을 들었으면 어떠하였을까? 중종이 조광조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 정광필과 남곤 등을 적절히 논쟁을 시키면서 조정을 운영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기묘사화와 함께 조광조의 개혁은 끝났고, 조선의 개혁도 끝났다. 중종에게는 특별한 계획이 보이지 않았다. (기묘사화 후, 정국공신을 원상복귀시키고, 소격서도 복구했다고 한다.)
조광조를 높이 등용할 것을 권했던 남곤은 그가 권력이 커지자 그를 견제했다. 조광조 사사 후 남곤은 영의정에 봉해지고, 영의정이었던 정굉필은 무너지고 만다. 조광조 제거로 악명을 얻었지만, 남곤은 그리 원칙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뇌물을 멀리했고, 차림도 수수했다고 한다. 뛰어난 문장 덕에 외교문서를 전담했고, 영의정으로서도 국정도 무난하게 이끌었다고 한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 시습은 바로 세워지지 않았고, 나라 살림이나 백성들의 생활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기묘사화 때문이라고 한다. 영의정 오르고 4년이 지나고 남곤은 눈을 감는다. 죽으면서 “내가 허명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는 이 글들을 모두 태워 없애도록 해라.그래야 내 허물이 더 무거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비단으로 염습하지 말아라.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시호를 청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않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조광조를 견제한 부분이 아쉽지만, 그래도 사리사욕은 부리지 않아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참정승 정광필, 정치인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본받아야 할 인물이 아닌가 싶다. 성종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연산 말년에 잠시 유배되었다가, 중종 8년에 처음 정승이 되었다. 이후 정승을 역임했지만, 한 번도 실권을 사져보지는 못 했다. 임금은 그의 말을 존중하면서도 참고만 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조광조가 득세할 때는 가장 강력히 반대의견을 냈고, 조광조가 죄를 받을 때는 가장 적극적으로 변호했다고 한다. 그의 견해는 언제나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실 정치가로서의 유연함 또한 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세를 살피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말을 올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중종 때의 권신 김안로, 정말 우리 역사에 없었으면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남곤이 죽자, 서서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조정을 장악하고는 말도 안 되는 보복정치를 하는데, 정말 읽는 순간 내내 짜증난다. 물론 중종이 내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짜증난다.

중종 시절은 연산군 덕분에 제대로 망쳐진 시기라고 생각되었다. 정치도 개판이고, 시국도 개판이고, 군사력도 개판인 상황에서 준비 안 된 중종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누구를 믿어야할 지도 모르고,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 지도 몰랐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중종이 조금만 더 정치에 대한 목적, 왕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백성을 위한 정치, 아니면 깨끗한 조정을 위한 정치, 아니면 군사력 강화를 위한 정치 같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1. 6. 17:56



12년간의 절대권력을 가졌던 연산군, 하지만 참담한 결과.

우선 작가의 후기를 먼저 이야기하자면, 세조 집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단종실록’이 왜곡됐듯이, ‘연산군일기’ 또한 반정 측의 명분 확보를 위해 많은 왜곡이 가해졌다고 한다. 연산의 성격 파탄적인 면이나 기행, 악행, 폭정, 무절제한 향락, 패륜 등이 강조, 과장되었고, 내용 면에서도 부실하다고 한다.

빡빡한 군주수업을 경험했던 성종은, 대개 세자 나이 여덟 살이 되면 성균관 입학례를 행하고 본격적인 수업이 들어가게 되나 연산은 열두 살에야 입학례를 치른다. 그리고 여름에도 쉬지 않고 공부했던 성종은 세자에게는 날씨가 너무 더우니 여름에는 조강만 행하도록 한다. 과연 자신이 경험해본 것이 별 도움이 안 되어서 그랬던 것일까? 자신을 질투하고 시기했던 전 부인의 아들이라 그랬을까?
연산 초기 4년은 큰 사건은 없었다. 연산군과 대간이 부딪치지만, 성종 때와 비슷하게 왕이 대간이 이기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연산군은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애쎴다. 대신들을 적절히 자기 편으로 만들면서 대간들을 견제하려고 했다. 첫 4년은 왕권을 강화시키는 왕으로서 잘 수행해나갔다.
그렇게 4년이 지나고 연산군은 드디어 폭발했다.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무오사화는 설명하기 너무 어렵다. (-_-;) 사림 세력과 훈구 세력의 당파 싸움이라 할 수도 있고, 김종직 제자들과 세조의 공신들의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실록으로 인하여 싸움이 났을 때, 연산군은 훈구세력의 편을 들어주고, 대간 세력을 견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유자광 역시 이를 틈타 권력을 가지게 된다. 과연 연산군은 대간 세력을 끌어내리는 것을 것을 계산하고 무오사화를 일으킨 것일까? 무오사화 후 잠시 태평성대를 누린다. 사림에 대한 유화조치를 취하기도 하고, 민생문제에도 나름대로 신경을 썼던 것이다.
단종 1년에 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은 노사신. 성종조에 들어서도 여러가지 책을 편찬하는 등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러나 성종 말년 이후 대간들의 주 공격 대상이 되었는데, 대간의 지나친 활동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산과 대간이 부딪칠 때 역시 연산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섰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역사에 간신으로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다. 무오사화 때 대형 옥사로 번질 듯하자 노사신은 사안을 축소시키려고 고군분투했다고 한다. 실제 그로 인해 많은 사림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무오사화가 마무리되고 얼마 안 있어 노사신을 세상을 떠났고, 그가 연산에게 남긴 유언은 “신의 소원은 상벌이 적절히 행해지게 되는 것과 전하께오서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는 것 뿐이옵니다.”이었다. 무오사화 이후 노사신이 연산군 곁에 남고, 유자광이 죽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나중에 연산군이 죽였을지도 모르지만.
취향에 관해서는 연산군은 부왕인 성종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시를 좋아하고, 그림 애호가였으며, 사냥도 좋아했다. 그러나 둘의 기질이 결정적으로 달랐는데, 성종은 대간의 눈치를 보는 반면, 연산군은 거침없이 자신의 뜻대로 했다.
하지만 연산군은 왕이 된지 5년 정도 지나면서 자신의 생활을 마음대로 한다. 씀씀이가 해퍼지고 특이한 물건에 대한 요구가 많아졌던 것이다. 그러다 연산군 9년 2월에 대간들은 시정전반에 걸친 상소를 올린다. 그 이 후 연산군 10년부터는 연산군의 피바람이 몰아치는 정치를 했던 시기이다. 성종의 후궁들을 그녀들의 아들들로 하여금 몽둥이로 치라고 하고, 인수대비를 찾아가 왜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냐고 한탄한다. 그렇게 갑자사화의 막이 오르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대신, 대간들을 모두 죽이거나 유배시켜 버린다. 그렇게 피를 통해 얻은 절대 왕권은 2년 후 중종 반정을 통해 왕위를 내주고 만다. 그 과정에서 연산의 아들들은 각기 따로 유배되었다가 이내 사사되었다고 한다. 그 중 연산과 달리 반듯하여 조정의 기대를 받았던 세자 황도 있었다. 아버지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세자였다.

아무런 목적 없이 이루려고 했던 왕권강화의 말로는 결국 반정으로 끝이 난 것이다. 연산군이 백성을 위한 정치, 깨끗한 정치,  구분 없는 인재를 등용하는 정치 등의 하나의 목적이라고 가지고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사람을 좀 더 죽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1. 5. 12:49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06. 예종, 성종실록 (휴머니스트 2005.08) – 대신권력에서 대간권력으로

요절로 인한 재위 기간이 짧은 예종
부왕인 아버지를 도우며 왕으로서 잘할 것이라 기대를 받았던 예종, 어린 나이지만 신하들과의 아버지의 묘호를 정하는데 자신의 뜻을 고수하여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재위 1년, 14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세자 시절부터 앓아오던 족질이 급격히 악화되더니 눈을 감고 말았다. 묘호는 자신의 희망에 따라 예종으로 결정되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인 세조를 도우면서 보였던 그의 일처리 솜씨가 왕으로서 어떠했을지 궁금하기는 하다.

비슷한 나이에 단종과 재위에 올랐지만, 너무 다른 결과를 만들었던 성종
예종의 운명 소식 후, 몇 몇 사람들이 주상을 정하였다. 원래라면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후계서열 1순위로 그 뒤를 이었어야 했으나, 그의 나이가 네 살이 불과했다. 성년이 되기까지는 16년이나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종의 형인 죽은 의경세자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열여섯 살의 월산군과 열세살의 자을산군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형인 월산군이 후계자가 되는 게 당연한데, 동생인 자을산군이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월산군의 병약과 자을산군의 뛰어난 자질을 이유로 들었지만, 애써 찾은 핑계였을 뿐, 결정적인 이유는 자을산군이 바로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로 한명회는 우리 역사에 없어야 될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영의정을 사직하고 물러났으면 좀 자중하고 살 생각을 했으면 좋았을텐데, 더 큰 권력을 생각하다니…
그리고 열두 살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었다. 하지만, 열세 살 성종에게는 막강한 후원자인 대비가 있었다. 그것도 세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예종비 안순왕후 한씨,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 한씨(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부인), 그리고 두 대비의 시어머니인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가 그들이다. 신하들의 청으로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수렴청정이란 나이가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되기까지의 일정기간 동안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신하여 처리하던 일이라고 한다.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는 세조의 부인으로, 생전에 세조는 그녀를 사랑하여 크고 작은 행사에 함께 참석하는 일이 잦았고, 주요한 사안이 있을 때면 종종 의견을 청해 듣곤 했다고 한다. 세조는 사랑하는 부인을 위해 그녀의 인척들을 모두 등용하고 싶어했는데, 그녀가 관직은 어진 사람들을 써야 한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이 진압되었을 때 ‘이시애의 반역이 나라에 화만은 아닌 듯 하옵니다.’라는 발언을 하는 듯, 자제력과 배짱, 그리고 세월을 거쳐오며 터득한 정치력까지 갖춘 그녀가 몇 차례의 사양 끝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권력을 가진 그녀가 보여준 최고의 미덕은 결코 자신을 앞세우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은 늘 손자에게 돌렸고, 과는 자신이 떠맡았다. 종친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은 예전의 자제력을 잃지 않으면서 손자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항상 고민했다. 그렇게 수렴청정의 전 기간을 통해 그녀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지은 제일의 준칙은 ‘손자를 위하여!’였다. 단종에게도 이런 어머니나 할머니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이윽고 성종 7년, 스무살이 된 후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의 중단을 선언하는 언문교지를 내린다. 결심이 확고했기에 성종은 친정을 선언한다. 그 후 대왕대비는 약속대로 정사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섭정을 그만두고 7년을 더 살고는 66세에 성종 14년에 눈을 감았다. 그녀 역시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우리 역사에 있어서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수양대군 같은 숙부가 있었던 것처럼, 성종이 왕위에 오른 열세살 때 숙부가 있었고, 그가 구성군이었다. 예종 때 남이의 옥사 후 구성군은 영의정에서 밀려나고 더욱더 행동을 조심했다. 하지만 훈구대신들은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대비마마가 계신다는 것 빼고는 단종 즉위 시의 상황이랑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성군은 조심하고 조심했으나 한명회와 신숙주에 의해 유배된다. 정말로 한명회와 신숙주가 너무너무 싫어지는 대목이었다. 한명회는 말할 것도 없고, 영의정만 두 차례에 걸쳐 10여 년을 역임했으며 외교에도 정통했고, 대학자이기도 한 신숙주, 하지만 끝까지 권력지향적인 모습도 보인다. 권력욕, 성욕, 재물욕 같은 것은 뭐라 하고 싶지 않다. 나도 돈 많이 벌고 싶고, 높은 자리에 앉고 싶고 그런 마음 있고 누구나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방법이 정말 자기 마음대로인 것 같다. 조카를 내친 수양대군 편을 들었으면서 성종이 왕위에 오르니 아무 사심 없어 보이는 구성군을 유배보내다니,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남을 짓밟는 행위라고 생각된다. 대왕대비 정희왕후와는 정말 대비되는 인물아닌가?
성종 시절 정계의 큰 권력을 잡고 있던 훈구 세력들이 하나둘씩 죽고, 성종이 그들을 견제하려고 새 인물을 등용하면서부터 사림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림은 고려 말 온건 개혁파, 정몽주, 권근의 문하에서 배운 길재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는데, 그 후진들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이 성리학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유교정치, 도학정치가 실현되어 좋은 점도 있었으니, 무와 과학이 천시되면서 국방력이 약해지고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점은 너무 아쉽다. 두루두루 균형잡힌 발전이 이루어졌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성종의 옥의 티라면 역시나 부인 윤숙의가 아닐까? 검소하고 예의 바르게 생활하여 성종은 물론 대비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지만, 국모가 되기 위해 연기한 것일가? 국모가 되고 나서 변한 것일 것? 그것은 그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중전이 된 후 태도가 바뀌어 성종의 미움을 사고,, 투기해서 모함까지 해서 성종의 분노를 산다. 그리하여 성종은 중전을 폐하고, 사약을 내린다. 자승자박이겠지만, 그 일로 연산군이라는 아주 큰 사건을 만들어내니 무서운 일이다.
세종 이후, 제2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성종도 훌륭한 왕이라 생각되다. 금승법을 택해 불교를 억압한 부분은 아쉽지만, 유교정치를 뿌리를 내리고 전 시대에 해오던 편찬 작업의 마무리도 성종 시절에 많이 했다. 위에 언급했지만 국방력과 과학 분야에서 아쉬운 점도 있다. 그리고 신하들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왕권을 잘 안정시켰다고 생각된다. 세종 이후 또 괜찮은 왕이라고 느낀 왕이다.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0. 2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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