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06. 예종, 성종실록 (휴머니스트 2005.08) – 대신권력에서 대간권력으로

요절로 인한 재위 기간이 짧은 예종
부왕인 아버지를 도우며 왕으로서 잘할 것이라 기대를 받았던 예종, 어린 나이지만 신하들과의 아버지의 묘호를 정하는데 자신의 뜻을 고수하여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재위 1년, 14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세자 시절부터 앓아오던 족질이 급격히 악화되더니 눈을 감고 말았다. 묘호는 자신의 희망에 따라 예종으로 결정되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인 세조를 도우면서 보였던 그의 일처리 솜씨가 왕으로서 어떠했을지 궁금하기는 하다.

비슷한 나이에 단종과 재위에 올랐지만, 너무 다른 결과를 만들었던 성종
예종의 운명 소식 후, 몇 몇 사람들이 주상을 정하였다. 원래라면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후계서열 1순위로 그 뒤를 이었어야 했으나, 그의 나이가 네 살이 불과했다. 성년이 되기까지는 16년이나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종의 형인 죽은 의경세자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열여섯 살의 월산군과 열세살의 자을산군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형인 월산군이 후계자가 되는 게 당연한데, 동생인 자을산군이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월산군의 병약과 자을산군의 뛰어난 자질을 이유로 들었지만, 애써 찾은 핑계였을 뿐, 결정적인 이유는 자을산군이 바로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로 한명회는 우리 역사에 없어야 될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영의정을 사직하고 물러났으면 좀 자중하고 살 생각을 했으면 좋았을텐데, 더 큰 권력을 생각하다니…
그리고 열두 살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었다. 하지만, 열세 살 성종에게는 막강한 후원자인 대비가 있었다. 그것도 세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예종비 안순왕후 한씨,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 한씨(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부인), 그리고 두 대비의 시어머니인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가 그들이다. 신하들의 청으로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수렴청정이란 나이가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되기까지의 일정기간 동안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신하여 처리하던 일이라고 한다.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는 세조의 부인으로, 생전에 세조는 그녀를 사랑하여 크고 작은 행사에 함께 참석하는 일이 잦았고, 주요한 사안이 있을 때면 종종 의견을 청해 듣곤 했다고 한다. 세조는 사랑하는 부인을 위해 그녀의 인척들을 모두 등용하고 싶어했는데, 그녀가 관직은 어진 사람들을 써야 한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이 진압되었을 때 ‘이시애의 반역이 나라에 화만은 아닌 듯 하옵니다.’라는 발언을 하는 듯, 자제력과 배짱, 그리고 세월을 거쳐오며 터득한 정치력까지 갖춘 그녀가 몇 차례의 사양 끝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권력을 가진 그녀가 보여준 최고의 미덕은 결코 자신을 앞세우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은 늘 손자에게 돌렸고, 과는 자신이 떠맡았다. 종친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은 예전의 자제력을 잃지 않으면서 손자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항상 고민했다. 그렇게 수렴청정의 전 기간을 통해 그녀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지은 제일의 준칙은 ‘손자를 위하여!’였다. 단종에게도 이런 어머니나 할머니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이윽고 성종 7년, 스무살이 된 후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의 중단을 선언하는 언문교지를 내린다. 결심이 확고했기에 성종은 친정을 선언한다. 그 후 대왕대비는 약속대로 정사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섭정을 그만두고 7년을 더 살고는 66세에 성종 14년에 눈을 감았다. 그녀 역시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우리 역사에 있어서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수양대군 같은 숙부가 있었던 것처럼, 성종이 왕위에 오른 열세살 때 숙부가 있었고, 그가 구성군이었다. 예종 때 남이의 옥사 후 구성군은 영의정에서 밀려나고 더욱더 행동을 조심했다. 하지만 훈구대신들은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대비마마가 계신다는 것 빼고는 단종 즉위 시의 상황이랑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성군은 조심하고 조심했으나 한명회와 신숙주에 의해 유배된다. 정말로 한명회와 신숙주가 너무너무 싫어지는 대목이었다. 한명회는 말할 것도 없고, 영의정만 두 차례에 걸쳐 10여 년을 역임했으며 외교에도 정통했고, 대학자이기도 한 신숙주, 하지만 끝까지 권력지향적인 모습도 보인다. 권력욕, 성욕, 재물욕 같은 것은 뭐라 하고 싶지 않다. 나도 돈 많이 벌고 싶고, 높은 자리에 앉고 싶고 그런 마음 있고 누구나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방법이 정말 자기 마음대로인 것 같다. 조카를 내친 수양대군 편을 들었으면서 성종이 왕위에 오르니 아무 사심 없어 보이는 구성군을 유배보내다니,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남을 짓밟는 행위라고 생각된다. 대왕대비 정희왕후와는 정말 대비되는 인물아닌가?
성종 시절 정계의 큰 권력을 잡고 있던 훈구 세력들이 하나둘씩 죽고, 성종이 그들을 견제하려고 새 인물을 등용하면서부터 사림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림은 고려 말 온건 개혁파, 정몽주, 권근의 문하에서 배운 길재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는데, 그 후진들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이 성리학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유교정치, 도학정치가 실현되어 좋은 점도 있었으니, 무와 과학이 천시되면서 국방력이 약해지고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점은 너무 아쉽다. 두루두루 균형잡힌 발전이 이루어졌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성종의 옥의 티라면 역시나 부인 윤숙의가 아닐까? 검소하고 예의 바르게 생활하여 성종은 물론 대비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지만, 국모가 되기 위해 연기한 것일가? 국모가 되고 나서 변한 것일 것? 그것은 그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중전이 된 후 태도가 바뀌어 성종의 미움을 사고,, 투기해서 모함까지 해서 성종의 분노를 산다. 그리하여 성종은 중전을 폐하고, 사약을 내린다. 자승자박이겠지만, 그 일로 연산군이라는 아주 큰 사건을 만들어내니 무서운 일이다.
세종 이후, 제2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성종도 훌륭한 왕이라 생각되다. 금승법을 택해 불교를 억압한 부분은 아쉽지만, 유교정치를 뿌리를 내리고 전 시대에 해오던 편찬 작업의 마무리도 성종 시절에 많이 했다. 위에 언급했지만 국방력과 과학 분야에서 아쉬운 점도 있다. 그리고 신하들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왕권을 잘 안정시켰다고 생각된다. 세종 이후 또 괜찮은 왕이라고 느낀 왕이다.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0. 2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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