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되지 못 했던, 고독한 왕 중종.
작가 후기에 나오는 중종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다른 두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는 것이다. 실록에 실린 사관들의 평가도 그러하다. “왕은 인자하고 현명했다. –중략- 다만 인자하고 온화함에는 넉넉했으나 과단성이 부족했고, 진퇴, 용사에 현명함과 불초함이 뒤섞이는 실수가 많았다. 이로 인해 군자와 소인이 번갈아 진퇴했고, 권간이 왕명을 도둑질했으며, 변고가 자주 일어났다. 정치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실록 역시 글쓴이의 주관이 들어가 있기에 100%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우유부단 했던 왕인 것 같다. 하지만 조광조나 김안로를 내칠 때의 왕은 굉장히 결단력이 빨랐는데, 그래서 이중성을 띤 왕이라고 하는 걸까?

중종시대의 대표인물은 박원종을 비롯한 정국공신들, 그리고 개혁을 단행하던 조광조, 현실과 타협하면서도 할 일은 했던 남곤, 그리고 갈아마셔도 모자란 김안로,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본 받아야 할 정광필 등이 있다.

중종은 왕이 될 자리에 서열에 있지 않아, 왕이 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대군이었다. 연산군 덕분(?)에 갑자기 왕이 된 중종은 처음부터 미덥지 못한 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연산군이 왕일 때에는 모두가 숨소리조차 죽여 지내던 시대였었기에, 그 역시 조용히 지냈을 것이고, 세자도 따로 있었기 때문에 따라서 자연스레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연산군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 났기 때문에 왕권보다는 신권들이 더 강했을 것이다. 그런 중종을 이용해 공신책봉부터 어이 없는 결정들이 나고 만다. 연산군의 총신들도 공신에 책봉되어지는, 대한민국이 독립하고 나서의 친일세력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상황이란 비슷한 상황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연산군 때 세력이 약화되었던 대간들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종 초기에는 유자광을 때려잡는 무오사화와 몇 번의 옥사를 통해 중종은 왕의 자리를, 공신들은 대신 자리를 잡아간다.
중종 초, 변방과 남도의 군사력은 약해져 있었는데, 그 때 3포 왜란이 일어났고,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만들 임시기구가 비변사였다. 경국대전에도 없는 이 임시기구는 사라지지 않고, 이후 점차 그 권한이 강해져 조선 후기에는 최고의 의결기구로 자리 잡으면서 왕권을 제약하기에 이른다. 군사력을 강화시켜야지, 비변사를 계속 놔두면 어떻하냐는 생각이 든다.
중종 8년, 정막개라는 사람의 고변으로 신윤무와 박영문가 죽음으로 반정을 이끌었던 핵심 공신들은 거의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고, 중종 10년 조광조가 나타나면서부터 개혁이 시작된다. 내가 알고 있던 조광조와는 상당히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느낌은 강경하고, 재물욕은 아니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과격한 사람이 아니라 굉장히 온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김굉필의 제자였던 조광조는 김굉필의 역향을 많이 받았다. 김굉필은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제자로 알려져 있지만, 스승이 사장(시와 문장)을 중시한다고 여기고 인연을 끊은 인물이다. 이후 홀로 경학 연구에 몰두했으며, 소학을 중시했다고 한다.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 떄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떄 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조광조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경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옛 성현의 가르침대로 행하려고 한다. 바른 자세, 경학 위주의 공부, 사색을 통한 원리 탐구, ‘소학’중시, 근본을 앞세우는 원칙적 자세 등 조광조가 몰고온 자람은 젊은 유생들을 매료시켰다고 한다. 중종 또한 늘 조광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소격서 폐지를 원하는 조광조와 그것을 원하지 않던 중종 사이에 조광조가 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만다. 그리고 정국공신을 바꾸라고 주장을 하자, 정국공신의 반감도 사게 되고 중종의 신임도 잃게 된다. 모두가 조광조의 공으로 돌리고, 조광조는 중종에게는 자신의 주장만 하였다. 조광조가 자신의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중종의 말을 들었으면 어떠하였을까? 중종이 조광조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 정광필과 남곤 등을 적절히 논쟁을 시키면서 조정을 운영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기묘사화와 함께 조광조의 개혁은 끝났고, 조선의 개혁도 끝났다. 중종에게는 특별한 계획이 보이지 않았다. (기묘사화 후, 정국공신을 원상복귀시키고, 소격서도 복구했다고 한다.)
조광조를 높이 등용할 것을 권했던 남곤은 그가 권력이 커지자 그를 견제했다. 조광조 사사 후 남곤은 영의정에 봉해지고, 영의정이었던 정굉필은 무너지고 만다. 조광조 제거로 악명을 얻었지만, 남곤은 그리 원칙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뇌물을 멀리했고, 차림도 수수했다고 한다. 뛰어난 문장 덕에 외교문서를 전담했고, 영의정으로서도 국정도 무난하게 이끌었다고 한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 시습은 바로 세워지지 않았고, 나라 살림이나 백성들의 생활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기묘사화 때문이라고 한다. 영의정 오르고 4년이 지나고 남곤은 눈을 감는다. 죽으면서 “내가 허명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는 이 글들을 모두 태워 없애도록 해라.그래야 내 허물이 더 무거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비단으로 염습하지 말아라.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시호를 청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않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조광조를 견제한 부분이 아쉽지만, 그래도 사리사욕은 부리지 않아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참정승 정광필, 정치인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본받아야 할 인물이 아닌가 싶다. 성종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연산 말년에 잠시 유배되었다가, 중종 8년에 처음 정승이 되었다. 이후 정승을 역임했지만, 한 번도 실권을 사져보지는 못 했다. 임금은 그의 말을 존중하면서도 참고만 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조광조가 득세할 때는 가장 강력히 반대의견을 냈고, 조광조가 죄를 받을 때는 가장 적극적으로 변호했다고 한다. 그의 견해는 언제나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실 정치가로서의 유연함 또한 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세를 살피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말을 올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중종 때의 권신 김안로, 정말 우리 역사에 없었으면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남곤이 죽자, 서서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조정을 장악하고는 말도 안 되는 보복정치를 하는데, 정말 읽는 순간 내내 짜증난다. 물론 중종이 내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짜증난다.

중종 시절은 연산군 덕분에 제대로 망쳐진 시기라고 생각되었다. 정치도 개판이고, 시국도 개판이고, 군사력도 개판인 상황에서 준비 안 된 중종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누구를 믿어야할 지도 모르고,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 지도 몰랐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중종이 조금만 더 정치에 대한 목적, 왕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백성을 위한 정치, 아니면 깨끗한 조정을 위한 정치, 아니면 군사력 강화를 위한 정치 같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1. 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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