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너무나도 짧았던 재위기간이었던 인종.

중종 실록에 인종에 관해서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중종 시절이 연산군 이후 정신 없는 시절이었고, 사화가 많아서 그랬던 것인가? 아무튼 인종은 천성이 어질고 유학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으로 온 조정의 기대를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계모 문정왕후를 지극한 효성으로 대했고, 나이로는 아들뻘의 연배인 이복동생 경원대군(문정왕후의 아들)을 우애로 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종 즉위 후 좌우에는 명망 있는 대신들이 포진했고, 사림의 맥을 잇는 신진들이 언관의 중심 세력을 형성했다고 한다. 인종 재위 때 신하들이 가장 역점을 둔 일은 ‘임금에게 제대로 된 밥 먹이기’였다고 한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부왕을 간호하는가 하면, 중종이 죽자 유교식 예법에 따라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했다고 한다. 너무나 착하고도 어진 임금이 아닌가? 약을 극구 거부하는 태도에서 보여지듯, 삶에 대한 의지나 미련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고 작가는 판단하고 있다. 향년 31세, 자식이 없었고, 재위기간 9개월도 안 되 눈을 감고만 인종, 착하고 어진 성격으로 적어도 5~10년간만 재위에 올랐으면 하는 생각이 너무나도 많이 드는 왕이었다.


문정왕후의 꼭두각시였던 명종.

당시 조정은 인종 측근이었던 윤임을 비롯한 대윤과, 명종(경원대군) 측이었던 문정왕후를 비롯한 소윤으로 나눠져 있었다. 중종이 생각보다 빨리 죽고 인종이 왕위로 오르자 소윤측은 긴장했지만, 인종은 보복정치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종 역시 왕위에 오르자마자 눈을 감아 명종이 왕이 되고 소윤측이 실세를 잡는가 했다. 조선에 다시 수렴청정의 기간이 오는데, 문정왕후를 이르러 조선을 통틀어 가장 권력이 셌던 여성이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명종 시절부터 조선의 짜증나는 역사는 시작하는 것 같다. 뭐, 그 이전부터 조선의 짜증나는 역사는 많았으니, 굳이 명종이 시작은 아닌 것 같다. 수렴청정을 한다고 해놓고는 여왕으로 정치를 하는 문정왕후, 정치를 하는 것은 좋지만 왜 보복정치(대윤에 대한)를 하냔 말이다. 과거에 윤임에게 당했던 것에 대한 복수라고 치더라도, 명종을 조금 더 키워주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래도 하나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은 대윤을 물리치고 나서는 이렇다 할 옥사는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녀의 국정 장악능력이 뛰어났고, 사치, 향락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궁중 연회도 좀처럼 열지 않았다고 한다. 역시 아쉬운 것은 사림을 혐오하고 측근들의 정보와 판단에 의존한 정치를 한 부분이 있는데, 측근들이 부패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명종 8년, 명종의 나이 스물이 되었는데도 수렴청정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그 해 7월 명종에게 친정을 넘겨주었다.
그렇게 명종 8년 문정왕후가 물러났지만, 명종은 자신만의 정치를 할 수 없었다. 문정왕후가 정치에 관여한 것은 아니었으나, 명종이 문정왕후의 눈치를 봐야했고, 조정에는 문정왕후의 측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는 그녀의 측근들이 하나 둘씩 제거되기 시작한다. 그 후 명종은 무엇인가 다른 모습을 보인 듯 하다. 하지만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2년 뒤 명종 역시 죽고 만다. 명종 자신만의 정치를 보여주기에는 짧은 시간이지 않았나 싶다. 연산군으로 황폐해진 조정을 빨리 바로잡아놨어야 하는데, 문정왕후와 명종, 문정왕후가 정희왕후처럼 명종을 위한 정치를 했었더라면, 명종 역시 성종처럼 성장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명종 때의 인물로는 10여 년 전에 드라마로 나왔던 임꺽정이 있다. 임꺽정이 도적이 된 이유에 대해 사관의 논평을 작가가 실어놓았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지금의 재상들은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끝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세가를 섬기느라 못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고는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랴?
진실로 조정이 청명하여 재물만을 탐하지 말고 어진이를 수령으로 가려 뽑는다면 칼을 든 도적들이 송아지를 사서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르려 추적하여 붙잡으려고만 한다면 붙잡는 대로 또 뒤따라 일어나 장차엔 다 붙잡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 후로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역시, 명종 때의 사람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영민했고, 공부를 좋아한 이황은 과거에는 큰 뜻이 없었지만 어머니의 바람을 좇아 준비하여 서른네 살에 급제했다. 풍부한 학식, 온유한 성품, 원만한 대인관계 덕으로 빠르고 순탄한 승진을 하나, 마흔다섯 살에 을사사화를 만나 학자로서 학문에 몰두한다. 기대승과 8년 동안 편지로 주고 받으면서 논한 사칠 논쟁도 학문에 몰두하면서 한 일이다.
그런 이황과 더불어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인 남명 조식은 이황과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이황이 학문 자체를 좋아하여 깊이 파고드는 유형이라면, 조식은 핵심을 체득하고 실천을 중시하는 유형. 이황은 현실정치에 몸담으면서도 시사 문제는 애써 피하려고 했고, 조식은 현실정치를 거부하면서도 세상사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분개하고 비판했다. 퇴계가 고요히 흐르는 물이라면 남명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 그렇게 다른 두 사람이었다고 작가는 판단하고 있다.
당시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대학자들답게 둘은 끝까지 서로에 대해 나름의 예를 지키며 표나게 대립하지 않았다. 하지만 뒷날 제자들은 상대의 스승을 비판하며 격렬히 대립하게 된다. 유성룔, 김성일, 조목, 기대승 등 그의 제자들은 퇴계학파를 형성하여 나중에 동인-남인의 중추를 이루게 된다. 남명학파를 형성한 조식의 제자들로는 정인홍, 김우옹, 곽재우, 최영경 들이 있다. 실천을 중시하는 조식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그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적극 활약했다. 동인-북인의 중추를 이룬 그들은 광해군과 함계 집권에 성공했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면서 괴멸되다시피 했다.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1. 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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