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05. 단종, 세조실록 (휴머니스트 2005.04) – 반역은 또 다른 반역을 낳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단종.

열두 살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된 단종, 그에게 가장 아쉬운 점은 넓디 넓은 궁궐에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남겨졌다는 것이다. 조부모님도, 부모님도 안 계셨기에, 정책의 결정은 대부분 의정부에서 이루어 졌고, 왕은 형식상의 결재만 담당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던 그였기에, 대신들의 결정에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할머니, 어머니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려는 모습이나, 치기 어린 모습은 한번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성종처럼 그를 보호해 주는 왕실의 어른이 1명만 있었더라면, 아니 수양대군이 왕에 대한 욕심만 없었더라면 어떤 모습의 왕이 되었을까?

단종 3년 단종은 희망이 사라졌음을 알고, 대보(옥새)를 수양에게 건네준다. 자신의 자리를 위해서 조카를 밟고 올라섰어야 했을까?

그렇게 왕위를 물려준 단종은 단종이란 모효도 뒷날 숙종조에 이르러 추증된 뒤, 노산군일기가 단종실록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목만 바뀌었을 뿐, 본문에서는 여전히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기술되어 있다. 편찬 경위는 물론 편찬 일시나 편찬자의 이름조차 나와있지 않다. 단종실록의 기본 서술 방향 및 강조점은, 어리고 불안한 임금, 김종서 등 대신들의 전횡, 안평대군의 왕위 찬탈 음모와 대신들의 결탁, 그리고 수양대군의 영웅적인 면모와 우국 충정이다. 박시백 작가는 1980 5.18 직후의 신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수양대군 측이 아닌 사람들을 낮은 평가를 내리려고 하는데, 김종서도 그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좌의정인 김종서가 우의정인 황보인보다 주요 결정을 내렸고, 그의 위세가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권세가 있다는 것이 곧 전횡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단종실록에서는 김종서의 매관매직이나 치부행위에 대해서는 별로 싣고 있지 않고, 집이 호화로웠다는 표현조차 없다. 이러한 정황들은 그가 엄청난 권력을 지녔으면서도 공인으로서의 절도를 잘 지켜 나갔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본받아야 될 사람 중에 하나라고 생각되는 사람이었다.

 

세조는 과연 되고 싶었던 왕이 되어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세종은 자식을 아끼고, 그리고 신권에 대한 견제의 목적으로 대군들을 등용했는데, 그 결과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무시 못할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수양의 야심에 대한 세종의 안목이 부족했던 것인가? 과소 평가했던 것인가? 많은 대신들은 안평대군의 손을 잡았는데, 그를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박시백 작가는 판단하고 있다. 그리 하여 안평대군은 한 순간에 형인 수양을 제치고 최강의 종친 실세로 부상한다. 박시백 작가의 조선 왕조실록을 읽은 내 느낌으로는 안평은 왕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것 같다.

중국 주나라에 주공이라는 사람이 있다. 공자가 진정한 성인의 표본으로 여겼다는 주공, 그는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 시대를 연 주 무왕의 동생이다. 두 무왕이 일찍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게 되자 주공은 섭정을 하게 된다. 사실상의 왕의 권한을 가지고 그는 강력한 정치를 펴 나갔다. 반발하는 세력은 힘으로 제압하는 한편 후세의 규범이 된 예악을 정립하고 중국식 봉건제도를 완성하는 등 주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쯤 되면 스스로 왕이 되려는 욕심이 생길 법도 하건만 조카인 성왕이 성년이 되자 두말 없이 모든 권한을 넘기고 자신은 일반 신하로 복귀했으니, 섭정 7년 만의 일이다.

주위에서 모두 수양을 주공이라 칭했지만, 그는 주공이 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자신의 동생인 안평을 죽이고, 아버지인 세종이 아꼈던 신하들을 모두 죽이고 왕이 오른 그다. 그러게 왕이 되어서 그의 정치는 어떠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세조는 정말 자신이 권력을 위해 왕이 된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나오는 연산군과도 별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세조였지만, 그래도 수양대군일기가 아니라 세조실록이기에 잘한 점도 있지 않을까? 우선 세조는 신하들과 잦은 술자리를 가지면서 군신 관계를 다져나갔는데, 후궁을 거절하는 등 금욕적인 모습을 보였고, 또한 검소했다. 그리하여 나라 살림에도 낭비가 없도록 조처했다. 절대 권력자로서의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국정 운영의 철학과 비전도 있었고, 부지런하기까지 하여 자기만의 업적을 쌓아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호패법 부활, 수령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 사민정책 추진, 경국대전 발표, 동국통감, 국조보감 편찬, 동국지도를 제작했다. 그렇게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한 세조였다.

세조하면 언급하지 않을 수 있는 두 사람, 바로 한명회와 신숙주가 아닐까? 글솜씨가 없었는지 매번 과거에 낙방하는 한명회, 권람과의 인연으로 수양대군과 인연을 맺고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한명회와 젊은 나이에 장원 급제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숙주, 수양대군과 같이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수양대군 측이 되고 만다. 수양대군의 어떤 부분에 끌렸던 것일까? 작가는 처신도 뛰어나고 능력도 비상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린 신숙자와 한명회였지만,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결여된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기개라고 하였다. 나 역시도 그런 부분이 아쉽다. 세조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공신을 일관되게 우대한 세조였기에 공신들은 세조의 비호 아래 거침없이 힘과 부를 키워나갔다. 고려말과 다른게 무엇이 있으랴? 그런 구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적개공신을 이용한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거짓말처럼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난다.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곽관 석실은 만들지 않도록 해라.’ 라는 유언을 남겨 과거의 절반밖에 안 되는 인력과 비용으로 산릉을 조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생들을 죽이고, 조카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죽이고, 과연 그는 무슨 꿈을 꾸었고, 왕위에 올라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0. 21. 14:2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04. 세종, 문종실록 (휴머니스트 2005.04) – 황금시대를 열다.

개인적으로 조선 시대에서 가장 훌륭한 왕이라고 생각했던 세종, 역시나 훌륭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도 인간인지라 100% 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태종이 갑자기 왕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많은 준비 없이 나라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태종의 의도가 더 중요했다. 태종이 물러났다고 해서 정치에 관여할지 안 할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으니 말이다. 태종은 태조나 정종과는 다르게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계속 정치에 참여했다. 말은 세종이 주상이었으나 태종이 쥐락펴락하는 바람에 2인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태종이 외척을 경계하는 습성이 세종에도 영향을 미쳐 세종의 부인의 집안도 박살이 난다. 태종도 아쉽고, 세종도 아쉬웠다. 자식의 부인의 집안인데 꼭 그렇게 까지 해야 했을까? 자신의 부인의 집안인데 좀 더 큰소리칠 수 없었을까?
그래도 태종이 상왕으로 있으면서 잘 한 것은 왜구를 토벌한 것이다. 전쟁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는 대비가 죽고 이듬해 태종은 태상왕의 존호를 받고, 권력과 명예를 거머진다. 아마 조선 시대 통틀어 권력과 명예를 가장 많이 가진 왕이지 싶다. 세종 4년 태종 역시 눈을 감는데, 어쩌면 이 때부터 진정한 세종의 시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박시백의 해석에 따르면 세종은 태종의 일생과 결단력을 존경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종은 정치 보복만은 하지 않았는데, 옳은 선택이었을까? 자기의 장모와 일가의 여자들을 관비로 만들 것을 주장한 유정현에게 보복하기는커녕 같이 정치를 해 나갔는데, 약간은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그렇게 못 할 것 같다. 보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에 대해 정확하게 검증은 하고 넘어 가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조선시대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만큼 대부분의 분야에서 황금기였다고 한다. 유학 뿐 아니라, 음악과 농업도 그랬고, 무엇보다 전에 없던 과학 분야가 빛이 난 시대가 아닌가? 그리하여 과학의 발달로 무기도 개선되고,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장영실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에 들어 문종의 세자 시절 아이디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강물의 수량을 재는 수표, 바람의 방향을 살피는 풍향계 등 이 설치되어 기상 변화도 다양한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농업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세종대왕이라고 한다면 한글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1443년도이지만 전세계적으로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글자로 가장 과학적이라는 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실록’에는 훈민정음 발표일 전날까지도 훈민정음의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 없었다고 한다. 박시백 작가는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통설이 잘 못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오히려 세종의 아들들과 딸이 도왔다고 하는 기록들이 종종 나온다고 한다. 미리 이야기했다가는 사대의 예에 어긋난다하여 오히려 묻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종대왕 시대라 해서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외교정책이 그 중에 하나이다. 전쟁의 경험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였을까? 세종은 중국에 사대 정책을 펼치면서도 그 전의 왕들에 비해 약간은 중국에 휘둘리는 느낌을 받는다. 좀 더 강경하게 나갈 수는 없었을까?
아쉬운 두 번째는 백성에 대한 정책인데, 시대를 너무 앞서 갔던 것인지 물건을 사고 파는데 화폐를 이용하도록 한 것이 실수 중에 하나이다. 화폐를 유통을 적극 추진시키려는 의도는 굉장히 좋지만, 무엇이든 처음부터 잘 되는 게 어디있을까?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진행시켰어야 했는데, 화폐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매매를 하다 적발될 시에 엄격한 법대로 처리한 것은 너무 심한 조치가 아니었나 싶다. 1차 산업과 2차 산업, 그리고 3차 산업에 대한 이해가 조금만 더 있었던 세종이었더라면 화폐 유통 전에 2차, 3차 산업을 발전시켰을텐데..^^;;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은 황희 정승에 대한 세종의 대우이다. 박시백 작가에 따르면 황희는 24년 간 정승으로 있었고 이 중 19년은 영의정으로 있었기에 갖가지 이야기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들에서 황희의 이미지는 온화, 청렴, 두루뭉술이라 할 수 있는데, 실록에 묘사된 황희와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온화하고 인정 많은 모습은 곳곳에 보이지만, 청렴과 두루뭉술은 거리가 멀어 보인다고 하였다. 자신의 사위가 잘못했을 때도 동료 정승인 맹사성에게 부탁해 엉뚱한 이에게 죄를 떠남겨 사건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개간 작업한 땅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당을 받는 대가로 벼슬을 주기도 했고 황희의 아들들도 평판이 안 좋았다고 한다. 그래도 황희만한 이가 드물다고 등용하였는데,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벌을 주고 시정하도록 하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 외에도 세종에 대한 것은 굉장히 많다. 이 전의 왕들에 비해 당파 싸움이나 신하를 죽이거나 하는 일이 없어서 아주 좋았다. 하지만 알고 있던 사실 중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 신기했고, 나는 비록 안 보고 있지만 ‘대왕세종’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이 책을 꼭 읽고, 드라마와 실록의 내용을 비교해서 정확한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물론 이 책도 박시백의 시각이 들어가 있지만..)

짧은 재위기간의 문종
준비된 임금 문종은 8살 때 세자에 책봉되어 성군을 위한 준비를 한 단계 한 단계 밝아나갔다. 아마도 세종 자신이 갑자기 왕이 되어 힘들었고, 장자가 아니라서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세자는 세종의 기대에 부흥했고, 신중하고 차분하며 끈기가 있었다. 20살이 넘어가면서는 세종 곁에서 실무를 배우고 돕기도 하였다. 세종 마지막 8년은 병든 세종을 대신하여 정무의 대부분을 직접 처리했다. 실록에 따른 문종의 자질은 굉장했다. 말수가 적고 말싸움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일단 논쟁이 일면 대학자도 당할 수 없었고, 문장은 일필휘지, 글씨도 빼어났다. 활은 쏘았다하면 백발백중, 천문도 잘 알아 일기예보도 정확했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했고, 역산, 음운학에 정통했으며 각종 기술에도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종이 요절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문종이 세상을 뜬 것은 서른 아홉 살 때로 성종(서른여덟)보다도 오래 살았다. 그러나 재위기간이 매우 짧고, 어린 단종을 두고 죽었기 때문에 요절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문종의 재위기간 2년 3개월, 성종은 25년 1개월) 그리고 세종이 열여덟에 문종을 낳은 반면, 문종은 스물 여덟에 단종을 낳았다.
문종을 문약한 임금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문종이 가장 역점을 두고 성과를 낸 분야는 다름 아닌 군사부분이다. 즉위 이듬해 직접 진법을 저술하여 수양대군과 김종서, 정인지에게 교정하도록 한 다음, 편찬하니 오행사상에 기초한 오위진법이다. 이 오진법의 이론에 따라 군사조직도 기존의 12사 체제에서 5사 체제로 개편하니, 이는 조선 전기 군사조직의 기본체계가 되었다. 그 밖의 분야에서는 문종만의 개성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문종의 특색이 발휘되기에는 재위기간이 짧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버지 세종의 정치 방식과 기본적인 노선이 똑같아서 그렇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30년을 넘게 세자로 있으면서 준비한 솜씨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 한 채, 재위 2년 3개월 만에 재발된 종기가 악화되어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윈 단종에게는 아무도 남지 않은 것이다. 만약..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문종이 조금만 더 일찍 단종을 낳거나, 세종이 죽기 전에 왕위를 넘겨 줬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0. 17. 15:3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03. 태종실록 (휴머니스트 2005.04) – 왕권을 세우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를 따라다니며 조선 건국에 큰 힘을 보탰지만, 정도전을 죽이고 두 번의 왕자의 난을 통하는 등 어렵게 왕이 된 태종 이방원. 그는 과연 왕으로써도 잘 했을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우선 그가 태조와 왜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을까?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태종이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인데, 정몽주를 죽이고 정도전을 죽이는 등의 그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까?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라도 태종이 없었더라면 왕이 되지 못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두번째 부인의 말에 넘어가 서자를 세자로 책봉한 것은 누가 봐도 잘 못 된 것인데, 그 판단에 좀 더 신중을 기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태종의 정치의 목표는 정도전과 비슷하게 개혁을 원했을지라도 방법은 달랐다. 정도전이 신권 정치를 원했더라면 태종은 왕권 강화를 꾀했기 때문이다. 왕이 강한 권력을 가지는 것과 그 반대인 신하가 강한 권력을 가지는 것 중 무엇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중용을 지키는 것이 중요할까? 그런 원칙적인 이야기보다는 백성에게 좋은 정책이 나올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그리고 조선의 정치 체제를 살펴 보면 왕 밑에 의정부(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가 있고, 그 밑에 6조 체제(행정)가 있고, 따로 사헌부과 사간원(대간, 언론), 그리고 의금부(사법)이 있다. 왕과 신하에서 신하를 또 나누면 의정부와 6조인 대신과 사헌부와 사간원인 대간이 있었는데, 왕과 대신, 대간은 서로 견제했던 것이다.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의정부의 기능을 약화시킨 6조직계제로 변화시켰다는데 6조직계제가 왜 왕권이 강한지는 잘은 모르겠다. 그리고 전국을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8도체제로 재편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단 이때는 함경도가 아니라 함길도였다.)

태종이 왕이 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사람 중에 그의 부인 원경왕후 민씨도 있다. 하지만 태종이 왕이 되고 난 후에 후궁을 여럿 만나는 등 민씨에게 잘 하지만은 않는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처가를 몰락시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인 태조가 부인에게 휘둘려 세자를 잘 못 책봉한 것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처가의 권력이 너무 쌔서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어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자신이 왕이 되는데 동지이자 참모이면서 후견이었던 민씨의 가족을 그렇게 몰락시켜야만 했을까?

그리고 태종과 함께 조선 초의 기틀을 만든 하륜에 대해서도 태종의 대우가 아쉽다. 부족하다는 것 절대 아니다. 오히려 과하다는 것이다. 하륜은 일처리가 빠르고 거침없어서 비방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오백 년 조선의 근간이 될 각종 정책들이 그를 통해서 입안 실행되었다. 그런 부분이야 칭찬 받아 당연하다. 하지만 재산 증식에 있어서도 거침없었기 때문이다. 친인척, 측근들과 함께 무단으로 백성들을 동원하여 간척을 하고는 그 땅을 사유화했고, 노비들까지 벼슬을 팔아먹는다는 비판도 있었으며, 현량을 추천하라는 명을 받고는 함량 미달의 측근만 추천하였다고 한다. 꼭 필요하다면 큰 허물도 덮어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왜 그렇게 부정부패가 심한지 모르겠다. 이제 막 읽기 시작했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거의 느낄 수 없다. 어쩌면 한국인에게는 부정부패 유전자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태종에게는 양녕과 효녕과 충녕, 그리고 막내 성녕, 이렇게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우선 이 이 태종 실록이 세종 때에 쓰였다는 것을 알고, 양녕과 충녕에 대한 평가를 봐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내가 알아오던 사실과는 매우 달랐다는 것이다.
태종은 자신이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자기 다음은 적장자로 하여금 왕을 잇게 하고 싶었던 생각은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양녕이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켜도 태종을 계속해서 용서를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효녕은 크게 튀지 않는 성격인 스마일맨이었다고 하는데 이도 맞는 것 같고 효녕은 왕의 자리에 별 욕심이 없어 보였다.
다만 양녕에 대한 평가과 충녕에 대한 평가는 잘 모르겠다. 양녕은 세자로 책봉된 후에 세자 교육을 받고, 충녕은 그러지 아니하였다. 그러한 교육이 양녕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양녕은 학문보다는 활쏘기와 사냥을 좋아했고, 주색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충녕을 달랐다. 어려서부터 영특한데다가 공부를 좋아했다. 세자교육 같은 틀에 얽매이지 않고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보고, 갖가지 악기를 익혔으며, 그림, 화초, 수석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통제되었던 세자교육 때문이었을까? 양녕의 성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외가를 몰락시킨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었을까? 그리고 충녕은 도발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고는 했는데 세자를 향한 충정이었을까? 아니면 도전이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양녕은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기에 태종은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다. 그리고 세자 책봉 후 2개월 뒤 자신은 물러난다. 충녕의 왕권을 위해서라고 하였다. (이것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빨리 왕이 되는 것이 어떻게 왕권이 더 안정될까?) 그렇게 태종은 18년 동안의 재위를 마친다.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0. 16. 12:4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02. 태조, 정종실록 (휴머니스트 2005.04)

1392년 공양왕 3년 7월 17일 이성계가 드디어 새 왕으로 추대되었다. 한반도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왕으로 올랐지만 그는 지도자로서의 실력 훌륭했을지 몰라도, 정치가로서의 능력은 약간은 부족했기에 개국 이후의 조선은 정도전이 이끌어 나가는 듯 하다. 그렇게 자기 뜻대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려를 버리고 역성혁명을 택한 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군대를 이끌고 역성혁명을 할 때의 이성계는 멋있었으나 왕으로서의 모습은 약간 실망이다. 부인의 등쌀에 못 이겨 세자를 두 번째 부인의 아들로 정한 것은 너무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첫번째, 두번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어리고 조선을 세우는데 특별한 공도 없고, 왕에 대한 준비도 없는 왕자였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막상 왕이 되고는 7년 밖에 왕좌에 있지를 못 했다. 생각보다 짧은 기간이다. 그리고 1차 왕자의 난 이후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왕은 며칠 뒤 세자 영왕군 방과에게 자리를 물려 주고 물러난다. 권력이 무엇인지, 이방원은 그렇게 정도전 등의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사람들을 죽이고서라도 왕이 되었어야 하는지 아쉽다. 그리고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은 죽기 전에 이방원에게 비굴하게 빌었다고 하지만, 태조실록은 태종에 이르러 하륜이 책임자가 되어 쓰여졌다고 한다. 정도전을 보고 이성계과 협력하여 힘을 기른 것처럼 자신도 이방원과 협력해서 힘을 길렀지만, 정도전을 싫어해서였는지 나쁘게 썼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태조의 정책 중에 마음에 안 드는 것 중에 하나가 공신제도이다. 공신제도의 취지는 좋으나, 그 상인 토지와 노비가 세습이 된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공신은 계속 생겨나기 마련인데, 토지가 계속 세습이 된다면 언젠가는 문제가 터지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차라리 조선 초기부터 공신은 본인에 한해서만 과전(땅에 대한 세금을 받는 권리)을 줬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켰지만, 자신이 왕이 되지는 않았다, 위의 3명의 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째형(첫째는 예전에 죽었다.)을 추대하고는 자신은 조정을 장악해갔다. 하지만 서자 밖에 없었던 정종이었기에 넷째 방간 역시 왕의 자리에 욕심을 낸다. 하지만 그 계획이 알려져 오히려 방원에게 당하고 지방에서 살게 된다. 3남인 방의는 일찍이 권력에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기에 정종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고 2년 2개월 만에 물러나고 태종의 시대가 온다.

태조 시대에서 아쉬는 것은 역성혁명을 해서 많이 달라진 것을 못 느끼겠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그 시대를 직접 살아보지 않고 평가하기에 한계점이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좀 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는데, 공신들에게 땅을 주고 권력을 주면서 세습하도록 한다면 그들이 고려 말의 권문세족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냥 당분간은 나아졌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인가? 아무튼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고려왕조실록도 읽어봐야겠다. 책으로 된 건 재미가 없던데….흠..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0. 15. 12:0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1. 개국 (휴머니스트 2005.04)

세계의 문화 유산이라는 조선왕조실록, 총 1893권 888책, 한글로 번역할 경우 320쪽짜리 책 413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국보 151호이자, UN의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선정한 세계적인 유물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체계적이고 실시간으로 당대의 기록이 정리된 예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러한 조선왕조실록은 한겨례신문사의 기자였던 박시백 작가가 만화로 재구성하였다. 실록의 내용을 토대로 작가의 시각으로 새로 그렸지만,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읽을 때마다 화가 나기 짝이 없다. 도대체 백성을 위한 정치, 백성을 위한 토론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권력, 그리고 무리를 나눈 당파싸움 등의 짜증나는 이야기가 많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야사에 알려진 것과 다른 내용도 꽤 있다. 예를 들면 황희정승 같은 경우 훌륭한 재상이었을지는 모르나 청렴 결백하지는 않았고, 요절한 문종도 병약한 모습의 왕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은 태조 이성계로부터 시작하지만, 박시백 작가의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이전의 개국편부터 존재한다. 아마 이성계의 성장과 역성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싶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물론 조선왕조실록에 모든 이야기가 다 실렸을 수도 있지만. 그러다 보니 고려의 마지막 몇 명 왕도 등장하는데, 그 중 공민왕과 공양왕도 등장하는데 꽤 인상적이다.
공민왕은 어릴 적에 원나라로 볼모로 잡혀가서 원나라로부터의 신임을 얻은 후 왕으로 등극한다. 하지만 공민왕은 원나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을 뒤집고 권문세족을 숙청하고 고려개혁을 단행한다. 그러다 가장 의지하고 믿었던 부인인 왕비가 죽는 바람에 그 의지가 약간은 사그라들지만 계속하여 개혁의 의지를 잊지 않고 무명의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을 해나간다. 그러다 신돈은 자신의 성공에 취하여 있는 도중, 신돈 때문에 약간의 힘을 잃은 권문세족과 신돈 때문에 성장한 신진 사대부에 의해 숙청당하고 만다. 분명 신돈이 시작할 당시에 다른 사람의 모함으로부터 자신을 믿어줄 수 있냐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책에서도 그랬지만 공민왕의 작품이었을 가능성도 농후해 보였다. 그렇게 사라진 공민왕의 개혁 의지는 공민왕이 아주 다른 왕이 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 후 힘 없이 내려온 우왕과 창왕 이후 공양왕은 45세에 떠밀려 왕이 된다. 이성계파가 장악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뒤집고는 공양왕은 왕으로서의 역할을 의외로 노련하게 잘 수행한다. 그렇게 공양왕이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정몽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그렇게 노련하게 고려를 유지해가던 공양왕이었지만,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 당한 이후로는 힘쓸 수 없이 자리를 내주고는 만다.
고려말의 대학자였던 정몽주. 도덕적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나라를 위해서라 꼭 도덕적인 일만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우왕, 창왕을 폐위하는데도 동참를 했고, 이성계파의 큰 세력인 정도전을 제거하려고도 하였다. 그 행동들이 모두 고려를 위해서였다. 박시백 작가의 해석에 따르면 정몽주는 ‘고려를 위해서’ 정치를 하는 것 같았다. 굳이 역성혁명을 하지 않고도 고려가 잘 될 수 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고려를 위해서 왕도 폐위 시켰는데.. 아무튼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정몽주 이후 마땅히 고려의 버팀목이 없어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01 개국편으로 시작하였다.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이 잘 이루어지다가 초심을 유지 못 하고 무너진 것이 너무 안타깝다. 권문세족의 횡포에 흔들리던 나라를 개혁은 잘 시작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정몽주의 한 순간의 판단이 그렇게 다른 결과를 낳을 줄이야. 그렇게 조선은 세워졌다. (뭐, 꼭 내가 고려의 편인 것 같지만, 잘은 모르겠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0. 14.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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