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04. 세종, 문종실록 (휴머니스트 2005.04) – 황금시대를 열다.

개인적으로 조선 시대에서 가장 훌륭한 왕이라고 생각했던 세종, 역시나 훌륭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도 인간인지라 100% 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태종이 갑자기 왕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많은 준비 없이 나라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태종의 의도가 더 중요했다. 태종이 물러났다고 해서 정치에 관여할지 안 할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으니 말이다. 태종은 태조나 정종과는 다르게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계속 정치에 참여했다. 말은 세종이 주상이었으나 태종이 쥐락펴락하는 바람에 2인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태종이 외척을 경계하는 습성이 세종에도 영향을 미쳐 세종의 부인의 집안도 박살이 난다. 태종도 아쉽고, 세종도 아쉬웠다. 자식의 부인의 집안인데 꼭 그렇게 까지 해야 했을까? 자신의 부인의 집안인데 좀 더 큰소리칠 수 없었을까?
그래도 태종이 상왕으로 있으면서 잘 한 것은 왜구를 토벌한 것이다. 전쟁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는 대비가 죽고 이듬해 태종은 태상왕의 존호를 받고, 권력과 명예를 거머진다. 아마 조선 시대 통틀어 권력과 명예를 가장 많이 가진 왕이지 싶다. 세종 4년 태종 역시 눈을 감는데, 어쩌면 이 때부터 진정한 세종의 시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박시백의 해석에 따르면 세종은 태종의 일생과 결단력을 존경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종은 정치 보복만은 하지 않았는데, 옳은 선택이었을까? 자기의 장모와 일가의 여자들을 관비로 만들 것을 주장한 유정현에게 보복하기는커녕 같이 정치를 해 나갔는데, 약간은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그렇게 못 할 것 같다. 보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에 대해 정확하게 검증은 하고 넘어 가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조선시대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만큼 대부분의 분야에서 황금기였다고 한다. 유학 뿐 아니라, 음악과 농업도 그랬고, 무엇보다 전에 없던 과학 분야가 빛이 난 시대가 아닌가? 그리하여 과학의 발달로 무기도 개선되고,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장영실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에 들어 문종의 세자 시절 아이디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강물의 수량을 재는 수표, 바람의 방향을 살피는 풍향계 등 이 설치되어 기상 변화도 다양한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농업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세종대왕이라고 한다면 한글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1443년도이지만 전세계적으로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글자로 가장 과학적이라는 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실록’에는 훈민정음 발표일 전날까지도 훈민정음의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 없었다고 한다. 박시백 작가는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통설이 잘 못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오히려 세종의 아들들과 딸이 도왔다고 하는 기록들이 종종 나온다고 한다. 미리 이야기했다가는 사대의 예에 어긋난다하여 오히려 묻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종대왕 시대라 해서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외교정책이 그 중에 하나이다. 전쟁의 경험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였을까? 세종은 중국에 사대 정책을 펼치면서도 그 전의 왕들에 비해 약간은 중국에 휘둘리는 느낌을 받는다. 좀 더 강경하게 나갈 수는 없었을까?
아쉬운 두 번째는 백성에 대한 정책인데, 시대를 너무 앞서 갔던 것인지 물건을 사고 파는데 화폐를 이용하도록 한 것이 실수 중에 하나이다. 화폐를 유통을 적극 추진시키려는 의도는 굉장히 좋지만, 무엇이든 처음부터 잘 되는 게 어디있을까?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진행시켰어야 했는데, 화폐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매매를 하다 적발될 시에 엄격한 법대로 처리한 것은 너무 심한 조치가 아니었나 싶다. 1차 산업과 2차 산업, 그리고 3차 산업에 대한 이해가 조금만 더 있었던 세종이었더라면 화폐 유통 전에 2차, 3차 산업을 발전시켰을텐데..^^;;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은 황희 정승에 대한 세종의 대우이다. 박시백 작가에 따르면 황희는 24년 간 정승으로 있었고 이 중 19년은 영의정으로 있었기에 갖가지 이야기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들에서 황희의 이미지는 온화, 청렴, 두루뭉술이라 할 수 있는데, 실록에 묘사된 황희와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온화하고 인정 많은 모습은 곳곳에 보이지만, 청렴과 두루뭉술은 거리가 멀어 보인다고 하였다. 자신의 사위가 잘못했을 때도 동료 정승인 맹사성에게 부탁해 엉뚱한 이에게 죄를 떠남겨 사건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개간 작업한 땅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당을 받는 대가로 벼슬을 주기도 했고 황희의 아들들도 평판이 안 좋았다고 한다. 그래도 황희만한 이가 드물다고 등용하였는데,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벌을 주고 시정하도록 하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 외에도 세종에 대한 것은 굉장히 많다. 이 전의 왕들에 비해 당파 싸움이나 신하를 죽이거나 하는 일이 없어서 아주 좋았다. 하지만 알고 있던 사실 중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 신기했고, 나는 비록 안 보고 있지만 ‘대왕세종’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이 책을 꼭 읽고, 드라마와 실록의 내용을 비교해서 정확한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물론 이 책도 박시백의 시각이 들어가 있지만..)

짧은 재위기간의 문종
준비된 임금 문종은 8살 때 세자에 책봉되어 성군을 위한 준비를 한 단계 한 단계 밝아나갔다. 아마도 세종 자신이 갑자기 왕이 되어 힘들었고, 장자가 아니라서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세자는 세종의 기대에 부흥했고, 신중하고 차분하며 끈기가 있었다. 20살이 넘어가면서는 세종 곁에서 실무를 배우고 돕기도 하였다. 세종 마지막 8년은 병든 세종을 대신하여 정무의 대부분을 직접 처리했다. 실록에 따른 문종의 자질은 굉장했다. 말수가 적고 말싸움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일단 논쟁이 일면 대학자도 당할 수 없었고, 문장은 일필휘지, 글씨도 빼어났다. 활은 쏘았다하면 백발백중, 천문도 잘 알아 일기예보도 정확했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했고, 역산, 음운학에 정통했으며 각종 기술에도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종이 요절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문종이 세상을 뜬 것은 서른 아홉 살 때로 성종(서른여덟)보다도 오래 살았다. 그러나 재위기간이 매우 짧고, 어린 단종을 두고 죽었기 때문에 요절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문종의 재위기간 2년 3개월, 성종은 25년 1개월) 그리고 세종이 열여덟에 문종을 낳은 반면, 문종은 스물 여덟에 단종을 낳았다.
문종을 문약한 임금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문종이 가장 역점을 두고 성과를 낸 분야는 다름 아닌 군사부분이다. 즉위 이듬해 직접 진법을 저술하여 수양대군과 김종서, 정인지에게 교정하도록 한 다음, 편찬하니 오행사상에 기초한 오위진법이다. 이 오진법의 이론에 따라 군사조직도 기존의 12사 체제에서 5사 체제로 개편하니, 이는 조선 전기 군사조직의 기본체계가 되었다. 그 밖의 분야에서는 문종만의 개성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문종의 특색이 발휘되기에는 재위기간이 짧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버지 세종의 정치 방식과 기본적인 노선이 똑같아서 그렇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30년을 넘게 세자로 있으면서 준비한 솜씨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 한 채, 재위 2년 3개월 만에 재발된 종기가 악화되어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윈 단종에게는 아무도 남지 않은 것이다. 만약..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문종이 조금만 더 일찍 단종을 낳거나, 세종이 죽기 전에 왕위를 넘겨 줬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0. 17.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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