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05. 단종, 세조실록 (휴머니스트 2005.04) – 반역은 또 다른 반역을 낳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단종.

열두 살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된 단종, 그에게 가장 아쉬운 점은 넓디 넓은 궁궐에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남겨졌다는 것이다. 조부모님도, 부모님도 안 계셨기에, 정책의 결정은 대부분 의정부에서 이루어 졌고, 왕은 형식상의 결재만 담당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던 그였기에, 대신들의 결정에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할머니, 어머니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려는 모습이나, 치기 어린 모습은 한번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성종처럼 그를 보호해 주는 왕실의 어른이 1명만 있었더라면, 아니 수양대군이 왕에 대한 욕심만 없었더라면 어떤 모습의 왕이 되었을까?

단종 3년 단종은 희망이 사라졌음을 알고, 대보(옥새)를 수양에게 건네준다. 자신의 자리를 위해서 조카를 밟고 올라섰어야 했을까?

그렇게 왕위를 물려준 단종은 단종이란 모효도 뒷날 숙종조에 이르러 추증된 뒤, 노산군일기가 단종실록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목만 바뀌었을 뿐, 본문에서는 여전히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기술되어 있다. 편찬 경위는 물론 편찬 일시나 편찬자의 이름조차 나와있지 않다. 단종실록의 기본 서술 방향 및 강조점은, 어리고 불안한 임금, 김종서 등 대신들의 전횡, 안평대군의 왕위 찬탈 음모와 대신들의 결탁, 그리고 수양대군의 영웅적인 면모와 우국 충정이다. 박시백 작가는 1980 5.18 직후의 신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수양대군 측이 아닌 사람들을 낮은 평가를 내리려고 하는데, 김종서도 그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좌의정인 김종서가 우의정인 황보인보다 주요 결정을 내렸고, 그의 위세가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권세가 있다는 것이 곧 전횡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단종실록에서는 김종서의 매관매직이나 치부행위에 대해서는 별로 싣고 있지 않고, 집이 호화로웠다는 표현조차 없다. 이러한 정황들은 그가 엄청난 권력을 지녔으면서도 공인으로서의 절도를 잘 지켜 나갔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본받아야 될 사람 중에 하나라고 생각되는 사람이었다.

 

세조는 과연 되고 싶었던 왕이 되어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세종은 자식을 아끼고, 그리고 신권에 대한 견제의 목적으로 대군들을 등용했는데, 그 결과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무시 못할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수양의 야심에 대한 세종의 안목이 부족했던 것인가? 과소 평가했던 것인가? 많은 대신들은 안평대군의 손을 잡았는데, 그를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박시백 작가는 판단하고 있다. 그리 하여 안평대군은 한 순간에 형인 수양을 제치고 최강의 종친 실세로 부상한다. 박시백 작가의 조선 왕조실록을 읽은 내 느낌으로는 안평은 왕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것 같다.

중국 주나라에 주공이라는 사람이 있다. 공자가 진정한 성인의 표본으로 여겼다는 주공, 그는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 시대를 연 주 무왕의 동생이다. 두 무왕이 일찍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게 되자 주공은 섭정을 하게 된다. 사실상의 왕의 권한을 가지고 그는 강력한 정치를 펴 나갔다. 반발하는 세력은 힘으로 제압하는 한편 후세의 규범이 된 예악을 정립하고 중국식 봉건제도를 완성하는 등 주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쯤 되면 스스로 왕이 되려는 욕심이 생길 법도 하건만 조카인 성왕이 성년이 되자 두말 없이 모든 권한을 넘기고 자신은 일반 신하로 복귀했으니, 섭정 7년 만의 일이다.

주위에서 모두 수양을 주공이라 칭했지만, 그는 주공이 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자신의 동생인 안평을 죽이고, 아버지인 세종이 아꼈던 신하들을 모두 죽이고 왕이 오른 그다. 그러게 왕이 되어서 그의 정치는 어떠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세조는 정말 자신이 권력을 위해 왕이 된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나오는 연산군과도 별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세조였지만, 그래도 수양대군일기가 아니라 세조실록이기에 잘한 점도 있지 않을까? 우선 세조는 신하들과 잦은 술자리를 가지면서 군신 관계를 다져나갔는데, 후궁을 거절하는 등 금욕적인 모습을 보였고, 또한 검소했다. 그리하여 나라 살림에도 낭비가 없도록 조처했다. 절대 권력자로서의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국정 운영의 철학과 비전도 있었고, 부지런하기까지 하여 자기만의 업적을 쌓아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호패법 부활, 수령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 사민정책 추진, 경국대전 발표, 동국통감, 국조보감 편찬, 동국지도를 제작했다. 그렇게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한 세조였다.

세조하면 언급하지 않을 수 있는 두 사람, 바로 한명회와 신숙주가 아닐까? 글솜씨가 없었는지 매번 과거에 낙방하는 한명회, 권람과의 인연으로 수양대군과 인연을 맺고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한명회와 젊은 나이에 장원 급제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숙주, 수양대군과 같이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수양대군 측이 되고 만다. 수양대군의 어떤 부분에 끌렸던 것일까? 작가는 처신도 뛰어나고 능력도 비상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린 신숙자와 한명회였지만,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결여된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기개라고 하였다. 나 역시도 그런 부분이 아쉽다. 세조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공신을 일관되게 우대한 세조였기에 공신들은 세조의 비호 아래 거침없이 힘과 부를 키워나갔다. 고려말과 다른게 무엇이 있으랴? 그런 구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적개공신을 이용한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거짓말처럼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난다.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곽관 석실은 만들지 않도록 해라.’ 라는 유언을 남겨 과거의 절반밖에 안 되는 인력과 비용으로 산릉을 조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생들을 죽이고, 조카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죽이고, 과연 그는 무슨 꿈을 꾸었고, 왕위에 올라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취미이야기/책, 만화  |  2008. 10. 2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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